김명식: 일본 패망을 바라던 사회주의자의 쓸쓸한 죽음
김명식,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에서 학문을 향유하던 시절의 그의 모습. 그는 1943년 5월 14일,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51세의 병든 남성의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회자되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 중에도 일본의 패망을 바랐던 김명식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 민족을 해방하려는 목표를 선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김명식은 그 기세에 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일본의 패망을 서원했습니다. 그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니, 나의 사망신고는 조국이 광복되고 민족이 해방되거든 하라.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내 두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
그의 유언은 사람들 사이에서 남몰래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듣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쓸쓸함과 비장함을 심어주었습니다.
도쿄와 서울 한복판에서 혁명을 맹세하다
김명식은 제주도 조천읍 조천리의 유복한 토호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신의 출세만 지향하는 삶을 경멸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는 비밀결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는 혁명단체였습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학문을 향유하던 시절, ‘신아동맹당’이라는 명칭의 비합법, 비공개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그 길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을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는 혁명단체였습니다.
그는 4년 뒤에 또 하나의 비밀결사에 참여했습니다. ‘사회혁명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단체였습니다. 이번에는 서울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국에 최초로 레닌을 소개한 저널리스트
그는 언론 지면을 통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선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동아일보> 1면에 장장 61회에 걸쳐서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글은 한국에 최초로 레닌과 볼셰비즘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언론 활동의 백미는 <신생활> 잡지였습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로 <신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신생활사의 이사 겸 주필이었습니다. <신생활>을 이끌어간 중심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 잡지는 고려공산당의 운동 자금이 투입돼 만들어진 합법 간행물이었습니다.
고문과 수감, 고난의 시작
결국 탈이 났습니다. 1922년 11월, 제13호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잡지사 구성원들은 실정법 위반 혐의로 체포, 기소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 ‘신생활사 필화사건’이라고 불린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잡지사는 폐간되었고, 김명식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명식은 취조 중 겪은 고문과 함흥형무소의 옥고로 인해 수감 중에 병을 얻었습니다. 그는 말라리아와 늑막염에 걸려서 형집행정지로 한때 출감되기까지 했습니다.
제주도에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제주도에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한번 그의 묘소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삶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습니다. 올곧게 신념을 지키며 한평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것만 같습니다. 고향 마을 조천리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한 송이 꽃을 놓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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